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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지_건약

자본주의에 대한 잔혹한 사랑의 기록


[2010 봄호]

자본주의에 대한 잔혹한 사랑의 기록

마이클 무어의 자본주의: 러브스토리

 

회원 윤영철

   


누가 신격화되어 버린 자본주의에 대해서 돌을 던질 것인가? 불과 20여년 전만 하더라도 자본주의는 인간이 선택 가능한 하나의 제도의 불과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 등등 수많은 대안적 사회체계 논의가 봇물처럼 용솟음 치던 시절에는 자본주의는 단지 극복해야할 대상 정도이었다 하지만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이후에 자본주의는 그 누구도 무너트릴 수 없는 거대한 우상이 되었고, 신념을 떠나서 습속이 되었으며, 극복 대상이 아니라 생존수단이 되어 버렸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신성모독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사라진 지구에는 괴물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 '역사의 종말'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도 자본주의일 뿐이라는 생각은 우리들 가슴과 뇌, 세포하나하나에 각인되어 버렸다. 하지만 2년 전 월가를 중심으로 하는 금융시스템의 붕괴는 자본주의가 얼마나 허약한 기반위에 존재하는 가를 새삼스럽게 깨우쳐준 사건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의 신용붕괴로 부터 시작된 금융위기는 시장자유경쟁을 도그마로 추앙하던 신자유주의 세력마저도 시스템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하는데 충분할 정도였다. 자율과 자유경쟁을 외쳤던 자본가들은 정부에게 달려가서 돈을 구걸하는 모욕을 당해야 했다. 자신의 도그마를 헌신 짝 처럼 버리고서라도 생존하고 싶어서 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탐욕과 뻔뻔함에 치를 떨었으며 구제 금융을 반대했지만 퇴임을 앞둔 부시와 워싱턴 정가는 이를 승인하고 만다. 이 지점에서 마이클 무어는 영화를 제작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탄생한 영화가 '자본주의: 러브스토리'이다.


마이클 무어는
GM의 최고경영자 로저를 인터뷰하려는 과정을 그리는 '로저와 나'라는 데뷔작을 필두로, 미국총기협회를 비판하는 '볼링 포 콜롬바인', 부시정권의 집권정당성과 테러리즘을 다룬 '화씨911' 미국 민간의료보험의 처참한 현실을 다룬 '식코'를 통해서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적인 팬들을 거느린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다. 마이클 무어는 기존의 다큐멘터리들이 삼자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는 카메라 워크를 고수할 때 자신이 직접 배우가 되어 묻고 투쟁한다. 뷰파이더에 있지 않고 렌즈 앞에 서서 주인공처럼 행세하는 그의 작품은 통쾌하기도 하지만 소웅주의적인 행위로 비추어질 여지도 충분하다. 하지만 그의 이런 전략은 대중들과 통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다큐멘터리 흥행기록은 그 자신이 깨지 않고는 깨질 수 없는 기록을 세워나간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런 그가 '자본주의: 러브스토리'라는 직설적인 제목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 영화에서 사태의 근본원인이 자본주의 시스템 그 자체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자본주의를 정면으로 다룬 것은 (물론 다른 작품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데뷔작인 '로저와 나' 이후 20여년 만이다. '로저와 나'는 GM공장의 폐업으로 황폐화되어버린 자신의 고향을 기록함으로써 자본가의 탐욕으로 희생되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그려내었었다.


영화는 1960년 다큐멘터리 필름인 '고대 로마인의 삶'의 장면들을 빌려온 ‘로마제국 멸망사’로 시작한다. 여기에서 나레이션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로마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하고 아름다운 제국이었다. 그러나 이 제국도 역사의 풍파를 비켜가지는 못했다. 비인간적인 노예제도에 의존한 경제, 심각한 빈부격차 속에서 로마는 쇠퇴해갔다. 정부는 시민들의 분노를 돌리기 위해 자극적인 오락과 스포츠를 대중장소에서 열곤 했다. 국가권력은 다시 황제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가장 인간적인 법을 발전시켰던 로마는 이제 더 없이 비인륜적인 사회로 전락해 버렸다. 이 모순이 공무원들의 무책임한 태도와 결합해 로마를 몰락의 구렁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이어서 영화는 팍스아메리카를 구사하던 미국의 현실을 보여준다.
금융위기와 함께 주택 융자금을 갚지 못해 길거리로 쫓겨나는 서민들, 정작 경제위기의 주범이면서도 서민의 세금으로 구원받는 금융기업들, 직장폐쇄로 해고된 노동자들, 월스트리트와 의기투합한 정치인들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영화 속의 정부와 언론은 서민들이 길에 나앉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하지만 탐욕으로 망하게 된 월가를 두고는 ‘월가가 망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망하는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며 공포를 조장한다. 그리고 '이윤추구’ 속에서 우리 삶이 어떻게 황폐해지고 사악해지는 지를 돌아볼 것을 요구한다. 집을 잃어버리고 길거리로 쫓겨나서 몰수된 남의 재산을 싸게 사면서 즐거워하는 시민들을 보여주면서 우리 자신의 악마성이 자본주의 제도에서 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영화는 상당히 직설적이다.
자본주의가 악이라고 종교인들의 입을 빌려서 고발하며, 자본주의가 민주주의가 아니며, 사회주의가 민주주의의 반대가 아니라고 역설하면서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미국인들에게 호소한다. 이런 장면들이 어찌 보면 유치하게 보이기도 하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이 작품이 큰 호응을 받지 못했는데, 이는 초등학교 수준의 상식적 발언들이 진지하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빨갱이 콤플렉스에 있어서는 둘째간다고 하면 서운해 할 우리나라에서 미국에서처럼 급진적인 발언처럼 들릴 것이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민주주의를 이야기 하면서 왜 직장에서는 이를 관철하려 하지 않는가하는 가를 묻는 장면이다.
노동자들이 나누어 가져야 할 응당한 몫을 극소수 경영자들이 독차지하는 것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못 느끼는지에 대해서 묻는 것이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이 공동으로 경영하고 수익을 배분으로 성공한 위스콘신 메디슨의 로봇회사를 보여주고, 다른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자본의 무자비한 해고에 맞서는 파업투쟁의 승리과정을 보여 주면서 노동자들의 단결의 중요성과 미래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또 하나는 왜 미국인은 위에서 1퍼센트의 소수가 아래로부터 95퍼센트를 더한 것보다 많은 부를 가지고 있는 현실을 용인하고, 왜 서민들은 ‘부자정당’을 지지할까라는 의문이다
. 무어가 내놓은 답은 ‘욕망의 투사’다. ‘너희도 열심히 하면 상위 1%에 낄 수 있어.’ 국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믿게 만든다. 국가가 유포하는 이 달콤한 착각 속에서, 서민들은 정당히 사회에 돌려야 할 분노를 부당히 자신에게 돌린다. 그리고 정치제도의 민주주의를 중요시 여기면서 경제적 민주주의는 무시해버리는 잘못된 믿음에서 원인을 찾는다. 이에 포섭되어 버린 서민들을 이용해서 국가권력은 다수의 이익을 무시한 채 부유층 감세정책과 기업 탈규제처럼 소수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내놓고, 부자들을 돕기 위해 서민들이 푼돈을 모아 낸 세금을 아낌없이 써버린다.


마이클 무어는 자본주의라는 제목에 왜 러브스토리라는 부제를 달았을까?
시카코 트리뷴의 유명 영화평론가인 로저 에버트는 "(<러브 스토리>의 명대사 ‘사랑은 결코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처럼) 자본주의란 결코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일 것"이다 라고 해석했다. 어떤 이는 “자본주의와의 불장난(a big love affair with capitalism)”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무어는 ‘자본주의는 절대다수를 불행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사회주의 좀 하면 안 돼?’란 질문을 던지면서 다른 체제로의 가능성과, 또한 이러한 변화를 한시라도 빨리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어가 주장하는 민주주의의 힘으로 잘못된 경제제도를 바꾸자 라는 것은 너무 교과서적이고 고리타분해 보이기도 하다. 급진적인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설픈 해결책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돈과 무력 모두를 가지고 있는 권력자들에게 대항 할 수 있는 것은 총이 아니라 정당한 주권의 행사일 수밖에 없다.


제 3세계인인 우리들 눈으로 보면 불편하게 느껴지는 장면들도 눈에 띈다.
신자유주의 이후 미국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대비시켜주기 위해서 2차 세계대전이후에 풍요로웠던 미국 노동자들의 생활을 보여 준 것은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불편함을 안겨 주었다. 그 풍요도 전쟁과 3세계 민중에 대한 수탈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는 본인의 눈으로는 그가 미국인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서 선전선동을 마다하지 않는 투사처럼 영화를 만든다.
그의 주장에 동감하는 관객들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역으로 주장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한없이 거북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토론(Discuss)이 아니라 논쟁(debate)과 논증(argue)이기 때문에 이런 불편한 시선을 게의치 않는다. 실제로 이 영화는 노골적인 제목과 내용 때문에 자신들의 권력기반에 영향을 줄 걸 우려해서 민주당지지자들로부터도 배척을 당하기도 했다. (영화 속에는 민주당지도자인 낸시 팰로우 하원의장 등이 월가를 위해서 어떤 일을 했는가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마이클 무어는 심각한 주제의 영화를 다루면서도 영화적 재미를 잃지 않는다.
영화적 긴장감을 떨어트리지 않고 유머를 집어넣는 재능은 그가 대중적으로 성공한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영향력 있는 감독이라는 명성을 안겨 주었다. '자본주의'는 그전 영화보다 유머장치가 약하다고 느껴졌다. 아마 나름 진지하게 영화를 만든 흔적이라는 생각이 든다(물론 그전 영화가 진지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만큼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관객들에게 던지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볼링포 콜롬바인'에서 미총기협회의 찰턴 해스턴을 찾아가듯이 마이클 무어는 영화의 마지막 씬에서 월스트리트의 건물을 범죄구역이라는 띠로 두르고 자본가들을 향해 확성기를 들고 이렇게 외친다. “당신들을 시민의 이름으로 체포한다.”

 

미국 발 뉴스에서는 월가의 맹주 골드만 삭스가 사기혐의로 오바마 행정부에 의해서 제소돼다는 소식이 들린다.

PS. 그의 영화 상당수는 이미 DVD로 발매되어 있다.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으니 구해서 보면 될 듯. 하지만 이미 절판된 작품들이 많아서 구해보기 어려우신 분들은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 구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