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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지_건약

죽은 자를 위한 추모, 산 자를 위한 투쟁

[2010 봄호]
[시사포커스]

죽은 자를 위한 추모, 산 자를 위한 투쟁

삼성 반도체 노동자 故 박지연씨, 스스로 권리를 주장하고 노력했던 노동자

 

공유정옥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

 

 

 

지난 3월 31일,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투병하던 박지연 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반올림 인터넷 카페에 ‘꼭 다시 건강해질께요, 감사해요~ ㅎㅎㅎ’라는 덧글을 남긴 지 두 달 만의 일이었지요. 반올림 활동가들에게 2년 이상 함께 해온 지연 씨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누군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이의 처지가 가련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우리가 힘든 까닭은 지연 씨가 불쌍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지연 씨를 처음 만났던 날을 돌이켜봅니다. 통원 치료를 위해 서울에 올라왔을 때, 서울 모처 친척집에서 만났더랬지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연방 마스크를 추어 올리며 조금 부끄러워하던, 스물 한 살 아가씨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사진을 한 장 찍는 것도 부담스러워했고, 특히나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머리가 빠지고 합병증에 시달리며 초췌해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더랬지요. 그러던 그이가 내 얘기를 좀 알려달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산재 인정이 정당하고 절실하다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겁니다. 산재 신청을 한 지 꼬박 1년 만에 열린 근로복지공단 자문의 협의회에, 투병 중인 몸으로 지연 씨는 직접 출석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제 재발할지 모르는 불안감에 떨며 살아가야 하고, 재발이 되기라도 한다면 더 이상 치료할 비용도 없을 뿐더러, 밥벌이도 못하고 이대로 병원비, 약값으로 엄마가 식당일로 벌어오는 생활비를 다 쓰기만 한다면 생계유지가 안 될 것 같고 살 수가 없을 것 같아 아프고 불편한 몸 이끌고 답답한 마음에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 더 이상 저와 같은 병에 걸리는 사람이 나오지 않길 바라며, 앞으로 제가 병원비, 생활비 걱정만은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근로복지공단은 치료비 보상과 생존권 보장을 마땅히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2009년 5월, 박지연씨의 진술서)

 

그이는 질병과 가난의 고통을 짊어지고 숨진 가엾은 ‘반도체 소녀’가 아니라, 그 뼈아픈 경험을 통해 스스로 권리를 주장해야겠다고 깨우치고 힘껏 노력했던 노동자였습니다. 늘 어서 나아서 반올림 투쟁에 힘을 보태겠다고, 지금 함께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곤 하던 책임감 있는 동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이의 마지막이 서럽고 안타깝습니다.

 

지연 씨가 세상을 떠난 후 반올림에는 언론의 관심과 제보 전화가 부쩍 늘었습니다. 퇴직 노동자들은 암에 걸렸던 옛 동료들의 소문을 전해오기도 했고, 라인 안에 얼마나 악취가 심했으며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화학물질 누출 사고는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지 모를 거라며 가슴을 쳤습니다. 어떤 일을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내 가족도 그 곳에서 일하다가 암에 걸렸다며 젊은 아내를 잃은 남편, 언니를 잃은 동생의 전화도 이어졌지요. 그래서 2010년 4월 현재 반올림이 알고 있는 삼성반도체 림프조혈기계 암 피해 노동자 수는 최소 26명, 이 중 사망자는 최소 10명으로 늘었습니다. 반도체 뿐 아니라 LCD 등 삼성전자 다른 계열의 노동자들, 그리고 뇌종양, 유방암, 피부암 등 다른 종류의 암 피해 제보까지 합치면 그 수는 더 많습니다.

 


아마도 지연 씨가 그 동안 소위 주요 언론의 무관심 혹은 ‘삼성 눈치보기’ 때문에 반올림의 투쟁을 알리거나 피해 노동자들을 찾아내는데 몹시 어려움을 겪어왔던 우리를 위해 힘을 불어넣어 주고 갔나 봅니다. 3년 전, 백혈병에 걸려 스물 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황유미 씨가 반올림을 결성하는 계기를 만들었듯이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몸의 고통은 어찌 덜 길이 없었지만, 가난한 부모님에게 치료비와 생계비 부담을 안겨드려야 하는 마음의 고통만은 덜어줄 수 있었을 텐데. 생전에 산재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힘차게 싸워 이기지 못해서 미안하고, ‘암에 걸릴 만큼 충분히’ 발암물질에 노출되었다는 것을 입증하지 않는 한 보상받을 수 없는 이 따위 산재보험 제도밖에는 마련해두지 못해서 부끄럽습니다. 이미 몇 년 전에 사라졌거나 변해버린 공정에서, 회사가 내놓는 자료만을 근거로, 당사자들의 참여 요청은 철저히 묵살한 채 역학조사가 진행되는 걸 막지 못해 미안합니다. 이런 식으로라면 삼성반도체 백혈병이 아니라 그 어떤 직업성 암 피해자들도 산재보상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분합니다. 집회장과 거리에서 발품을 팔아가면서 모은 돈, 살림살이 뻔하고 자기 역시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 주머니에서 나온 천원짜리 만원짜리로 모은 우리의 후원금으로는 하루 치료비도 댈 수 없었던 우리, 살림살이가 어슷비슷한 단체들이 모여 한두 푼 분담금을 모아야 하는 처지라 유인물를 5천 장 찍을까 3천 장 찍을까 고민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가 분합니다. 그에 비해 산재 신청만 포기하면 치료비를 다 대주겠다고 큰소리 치고, 하루 아침에 기자 여든 명을 불러다가 ‘공장 투어’를 시키며 백혈병 논란을 잠재우겠다고 설치는 삼성전자의 부당한 권세가 분합니다.

 

분한 건 또 있습니다. 디지털 강국이라는 껍데기를 벗겨놓고 보니 이미 미국 실리콘밸리의 IBM 공장에서, 영국 그리녹의 내셔널반도체 공장에서, 대만의 RCA 공장에서 수백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암에 걸리고 유산과 불임으로 고통받아왔던 역사를 21세기 이 땅에서 그대로 되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분합니다. 직업병과 환경오염 문제, 노동권을 탄압하는 무노조 정책은 어느 나라 출신이건 전자산업 자본들 모두의 문제였는데, 어느 하나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규제가 적은 아시아 개도국으로 옮겨온 것이더군요.

 

그럴 때마다 되새깁니다. 정당한 산재보상을 통해 생존권을 보장받는 일,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삼성에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세우는 일, 그리고 이런 고통의 역사를 세계화해온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일이 바로 반올림 활동 목표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리고 미안하고 부끄럽고 분한 마음들을 꼬옥 끌어안습니다. 그 마음이야말로 사람다운 마음이니까요.

 

2010년 5월 18일은 박지연 씨의 49재입니다. 죽은 이가 더 나은 세상에 갈 수 있도록 기원하는 것이 49재라고 하더군요. 지연 씨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더 나은 세상이란, 건강하고 안전한 일터에서 노동자들이 자기 권리를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는 세상, 혹시라도 병들거나 다쳐도 가난과 질병의 고통을 개인에게 떠넘기지 않고 사회가 충분한 돌봄을 제공하는 세상, 극소수의 자본가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지 않고 뭇 사람들이 평등한 관계 속에 자유로운 세상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직업병으로 죽어간 노동자들을 진정으로 추모하는 일, 그들의 죽음 앞에 사람으로 마주하는 일, 바로 지금 살아있는 이들이 힘을 모아 싸우는 것 말고 뭐가 또 있을까요. 그래서 반올림은 다시 한번 외치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위한 추모! 산 자를 위한 투쟁!”

 

 <반올림에 힘을 보태는 방법>

1. 삼성의 책임을 촉구하는 국제청원운동에 참여하기 (it.nodong.net/petition)

2. 반올림 카페에 응원글 남기기 (cafe.daum.net/samsunglabor)

3. ‘사진 한 장의 연대’ 참여하기 (자세한 내용은 카페 참조)

4. 피해 노동자들을 위한 헌혈증, 치료비 모금에 참여하기 (피해노동자 후원 계좌 : 489701-01-472635 국민은행 김재천(삼성반도체대책위))

5. 반올림 활동 후원하기 (반올림 투쟁기금 계좌 : 489701-01-479168 국민은행 김재천(삼성반도체대책위))

6. 반올림 투쟁과 반도체/전자산업 노동권 문제에 대한 책 읽기 ; “Challenging the Chip-세계전자산업의 노동권과 환경정의”(메이데이출판사), “삼성반도체와 백혈병”(삶이보이는창 출판사)

7. 여러 소모임을 통해 간담회, 강좌 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