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의약품접근성

“먹을 수 없는 약은 약이 아니다”-의약품 접근권

의약품과 접근권 “먹을 수 없는 약은 약이 아니다”

- 건강사회를위한 약사회 정책실 접근권팀 정소원

 

1919년 바이마르 헌법에서 “인간이 기본적인 생활을 할 권리”로서 ‘사회권’을 명시한 이래로, 인류의 ‘건강권’에 대한 고민도 점점 깊어져갔다. 1946년 세계보건기구헌장을 보자. 벌써 수십 년도 지난 문서에서 ‘도달 가능한 최고 수준의 건강을 향유하는 것은 인종, 정치적 신념, 경제적 또는 사회적 조건의 구별 없이, 모든 인간의 기본적 권리다.’라며 인류의 건강권을 명시하고 있다.

도달 가능한 최고 수준의 건강을 향유할 권리. 우리의 건강권. 이것은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권리’에서 시작하여 마땅한 예방서비스를 받을 권리, 좋은 주거 환경과 교육에 대한 권리까지를 포괄한다. 여기에, 건강에 있어 불필요하고 피할 수 있는 차이는 없어져야 한다는 건강형평(Health Equity)에까지 개념이 확장되고 있다. 다시 말해 질병에 걸렸을 때 적절한 치료를 받을 권리는 건강권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본권인 ‘건강할 권리’를 의약품에 국한해서 다시 생각해 보자. 질병에 걸렸을 때 그에 적절한 치료법으로서의 의약품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인종이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 따른 차별은 없어야 한다. 이것이 의약품에 대한 접근권이다.

 

그런데 우리의 건강할 권리, 특히 의약품 접근에 대한 우리의 권리는 기업이 의약품에 대해 가진 권리, 지적재산권과 배치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의약품의 라이프 사이클에서 접근의 문제가 발생하는 지점을 살펴보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의약품은 대학연구소, 국공립연구소, 제약회사 연구소 등에서 기초연구를 거쳐 유효물질이 탐색되면 이에 대한 물질특허를 출원하게 된다. 이로써 특허를 인정받은 특허권자는 그로부터 20년의 독점기간을 보장받게 된다. 더불어 제약회사는 시판허가를 받기 위한 임상시험에 돌입한다. 이것은 약의 효과와 안전성을 증명하기 위한 것으로 종합병원 등 임상시험 센터에서 수행된다. 임상시험으로 효과와 안전성이 입증되고 나면 식약청에 허가를 요청한다. 허가를 받은 뒤에는 판매를 할 수 있게 되지만, 보통 재정을 부담하는 기구(건강보험공단)의 약가결정제도 하에서 약가가 정해진 후 시판을 하고 마케팅이 시작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환자로 하여금 약을 먹을 수 없게 하는’, 지점을 찾아보자. 우선 기초개발 단계에서 연구의 관심사가 돈이 되는 질환에 치우침으로써 소외된 질환이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특허 출원 후에는 특허 독점 기간으로 인해 가격경쟁이 일어나지 않고, 공급의 독점권을 매개로 환자들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는 사례들이 존재한다.

우리의 건강권, 의약품의 접근권을 저해하는 장애물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1) 개발되지 않는 의약품

 

◎ 효과 좋은 약이 아직 없다는데, 현대 과학기술로는 아직 어려운가봐?

☞ 제약회사의 연구개발은 ‘약을 구매할 능력이 있는’ 선진국 국민들의 질병에 치우쳐 있다. 제3세계의 풍토병이나 말라리아, 결핵으로 ‘아이들이 너무 빨리 죽어’가도, 소위 돈이 되지 않는 질환은 연구개발을 하지 않거나, 약이 있어도 판매하지 않기도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 너무 비싼 의약품

 

◎ 제약회사가 이리도 많은데 약값도 떨어지겠지... MP3나 노트북 가격도 몇 년 지나면 팍팍 떨어지던걸?

☞ 여기에 바로 ‘특허’가 등장한다. 특허기간동안은 독점이 보장되기 때문에 다른 회사에서 같은 제품을 생산할 수 없고, 시장에서 가격경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건 노트북이나 MP3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의약품에서는 왜 문제인가? MP3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즉 신기술을 도입해 가격이 비싼 A사 제품을 사는 대신, 특별한 기능은 없지만 기본기능에 충실하면서 저렴한 B사 제품을 택할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있다. 그러나 의약품은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다. 폐암진단을 받은 내가, 폐암치료제가 비싸다고 해서 좀 더 값이 싼 폐결핵 치료제를 먹을 수 있느냐 말이다.

 

◎ 약은 ‘연구개발비’가 많이 든다며? 약값이 비쌀만 하니까 그렇겠지.

☞ 제약회사에서는 의약품 개발에 ‘천문학적인’ 연구개발비가 든다고 한다. ‘그래서 그게 얼마냐’는 질문에는 한 번도 답한 일이 없다. 사실 그 ‘연구개발비’에는 시민들의 세금과 공적자금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연구개발에 투자되는 비용에는 다양한 세금감면과 조세 혜택이 주어지고, 정부기관과 공적자금들이 지원을 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1999년 제약분야 R&D에 투자된 비용의 60%만이 제약회사가 부담한 것이었다. 그 뿐이 아니다. 제약사들이 ‘연구개발비’보다 ‘마케팅비’에 더 많은 지출을 하고 있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요약해보자. 제약사들은 ‘천문학적인 비용의’ 마케팅을 하고 있다.

 

◎ 제약회사도 돈 벌어 장사하는 곳인데, 걔네도 남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어?

☞ 제약회사 수익률은 70년대 이래로 전 산업 1위다. 포춘지가 선정한 2001년 500대 기업 중에서, 1위였던 제약업의 수익률은 18.5%였던 반면, 500대 기업 수익률의 중간값은 3.3%에 불과했다. 2위인 금융업의 13.6%를 훨씬 넘어서 있다. 우리의 보험료와 본인부담금, 정부의 보건재정이 제약회사를 살찌워왔다.

 

◎ 훌륭한 약을 발명하면 특허권을 인정해 줘야지, 연구를 안 하면 어떡해?

☞ 새로 개발되는 상당수의 의약품은 ‘훌륭한’ 약이 아니라, ‘열등하지 않은’ 약이다. 미국 FDA에서 1989-2001년에 허가받은 신규의약품 중 기존 치료제보다 ‘나아진’ 효과를 입증한 약은 24%에 불과했다. 물론 기존 치료제보다 나아진 것은 없지만, 신규 의약품은 기존 치료제보다 높은 약가를 인정받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3) 공급되지 않는 의약품

 

◎ 외국에선 쓰고 있는 약이라는데, 우리나라에선 살 수가 없네?

☞ 제약회사는 특허로 독점판매권을 가지면서 동시에 판매에 대한 결정, 공급에 대한 결정도 독점한다. 각 국가의 특허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에이즈 퇴치’ 등의 보건프로그램이 이윤을 저해하기 때문에 출시를 거부한 사례들이 다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로슈가 에이즈치료제인 푸제온을 3년째 판매하지 않고 있다. 주사제 한 병당 2만5천원, 1년에 1800만원인 우리나라 보험약가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개발되지 않고, 공급되지 않고, 너무나 고가여서 환자로 하여금 약을 먹을 수 없게 하는 경우들을 살펴보았다. 우리의 건강권과 배치되는 특허권, 그것을 이윤의 수단으로만 악용하는 제약회사들의 횡포를 살펴보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건강권이 도달 가능한 최고 수준의 건강을 향유할 권리라 한다면, 의약품 접근권은 ‘효과좋은 약을, 적당한 가격으로 먹을 권리’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권리를 갖게 되었냐고? 그것은 인류가 ‘건강할 권리’를 위해 싸워온 일련의 과정이 있고 그 싸움은 지금도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평생 감당해야 할 약값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백혈병 치료제, 그것의 가격인하와 강제실시를 주장하며 우리는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리고 광우병 소고기를 먹지 않을 권리를 위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서고 있고, 그것을 호도하는 언론권력과도 계속해서 대척 중이다. 이런 싸움들이 우리의 건강할 권리를 바로 내 것이게 하는 과정이고, 의약품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의 손으로 되찾는 과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