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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료제도및복지정책

건강과 국력, 그리고 의료서비스 산업화/서울경제(이진석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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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과 국력, 그리고 의료서비스 산업화


 




이진석교수(서울의대 의료관리학)


1912년 영국이 의료보험을 도입하게 된 중요한 계기는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지속된 보어전쟁의 경험 때문이었다. 보어전쟁으로 인해 영국에서 처음으로 징병제가 도입되었는데, 징집 대상자의 무려 40%가 신체 허약과 결함으로 군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은 것이다. 군복무도 못할 정도로 허약한 ‘3등 국민’으로는 ‘1등 제국’을 유지해 나갈 수 없다는 위기감이 영국 국가지도자들을 엄습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의 일환으로 의료보험을 도입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1975년에 실시된 전국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40%가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국민의 평균 수명은 선진국의 2/3 수준에 불과했고, 영아사망률은 곱절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절대 다수의 국민이 병약한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이런 상태가 지속되었다면,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압축 고도성장을 이룰 수 있었을까? 1977년 처음 도입되어 1989년에 전국민을 대상으로 확대된 의료보험은 의료서비스에 대한 국민의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과거에는 병원에 갈 엄두도 못 내던 사람들이 병원의 문턱을 넘어설 수 있게 되었고, 건강한 신체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 사람들이 밤낮 없이 일하면서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낸 것이다.


외국의 무수한 사례와 우리나라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의료가 국력 증진에 가장 확실하게 기여할 수 있는 길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국민을 길러내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신체적, 정신적으로 병약하다면, 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의료가 국력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또 다른 경로를 강조하는 의견들이 심심치 않게 제시되고 있다. ‘의료서비스를 산업으로 육성하자’는 의료서비스 산업화론이 그것이다. 요양기관 당연지정제를 폐지해서 건강보험 환자를 안 받는 병원도 허용하고, 영리의료법인을 허용해서 병원도 주식회사처럼 운영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민간의료보험 시장이 더욱 활성화될 수 있도록 건강보험의 진료정보를 민간보험회사에게 제공하고, 민간의료보험 상품에 대한 세제 혜택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환경이 조성되어야 첨단의학기술 발전도 촉진되고, 의료 부문의 일자리도 늘어나며, 국내 환자의 해외 유출도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료서비스 산업화론이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의료서비스 산업화론의 요지는 ‘의료서비스를 통해 돈을 벌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가? 부유한 외국 환자를 유치해서 달러를 벌자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의료서비스 산업화로 인해 우리나라 국민과 기업이 더 많은 비용 부담을 떠안게 된다면 ‘득’보다 ‘실’이 더 많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의료서비스 산업화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미국의 예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2004년 8월 19일자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경제 회복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고용 증가가 부진한 주된 이유는 급속히 치솟고 있는 건강보험료 때문이라고 진단하면서, “그 동안 회사 매출을 크게 늘었지만, 의료보험료를 빼고 나면 남는 게 없다”는 미국 기업 CEO의 푸념을 전하고 있다. 2005년 제너럴모터스의 정크본드 추락에 대해서도 종업원에 대한 과다한 연금과 의료비용 부담이 수익성을 악화시킨 주된 요인이라는 진단이 공통적으로 제기되었다. 최근 미국에서 민간의료보험을 둘러싼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이해관계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의료서비스 산업화를 통해 고용을 촉진한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다. OECD 국가 중에서 병원의 1개 병상당 고용자 수가 가장 많은 국가는 의료서비스 산업화와 전혀 상관없는 의료체계를 채택하고 있는 영국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영국 병원의 대부분은 국가 소유이고, 개업의사도 준공무원 신분이다. 이런 영국에서 병상당 고용자 수가 가장 많은 이유는 환자 간병과 간호를 병원에 소속된 간호사와 간병인이 전적으로 담당하기 때문이다. 병상당 고용자 수가 우리나라보다 몇 곱절 되는 다른 여러 국가들의 사정도 매일반이다. 우리나라처럼 환자 간병과 간호를 가족이 담당하는 하는 한, 아무리 주식회사 병원을 만들어도 일자리는 늘지 않는다. 더군다나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005년 기준으로 이미 3만 여개 급성기 병상이 과잉 공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병원의 평균 병상 이용률이 OECD 평균보다 10%p 낮은 65%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의료의 전반적인 과잉을 더욱 부추길 의료서비스 산업화가 과연 타당하고 효율적인 선택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혁신의료기술 개발은 지속적으로 장려되어야 하며, 일부 계층에게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고급의료에 대한 서비스 욕구도 충족되어야 한다. 그러나 의료서비스 산업화가 기업과 일반 서민의 의료비용 부담을 덩달아 늘리는 결과를 야기해서는 곤란하다. 일반 서민의 의료 접근성이 악화되고, 미국처럼 의료비용 때문에 기업의 국제 경쟁력이 약화될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료서비스 산업화를 추진하더라도 그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선별적이고 제한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지난 3월 10일에 이루어진 기획재정부의 대통령 업무보고에는 무차별적이고 매우 적극적인 형태로 의료서비스 산업화를 추진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새정부의 의욕이 앞서 ‘소탐대실’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지 우려되는 대목이다.


“건강을 잃고 나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은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의료가 존재하는 본연의 이유는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고, 증진시키기 위해서이다. 의료가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 국가와 사회에 가장 확실하게 기여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